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돌아와요 부산항에 (문단 편집) == 역사 == 법원이 인정한 가사 표절 판정곡이다. 정확히는 이 곡의 작사 겸 작곡가 황선우가 가사의 일부를 표절했다는 판정이다.[* 작곡은 황선우 본인이 했다.] 사연은 조금 복잡한데, 이 곡의 창작, 편곡 과정과 연결되어 있다. 작곡가 황선우가 1969년에 처음 이 곡을 처음 만들었을 때의 제목은 "돌아와요 부산항에"였다. 황선우는 이 곡을 통영 출신의 가수 지망생이었던 김해일(본명 김성술)과 음반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, 김해일이 "통영과 관련된 노래를 부르면 통영시[* 당시는 충무시]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."라고 얘기를 하여 제목을 "돌아와요 충무항에"라고 바꾸고 이 곡에다가 김해일 본인이 가사를 작사한 후 김해일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불러 <유니버어살레코오드사>가 1970년 12월16일에 발표했다.[[http://www.idomin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383353|#]][* 제작은 12월 16일이고, 발매는 1971년 1월 4일일 가능성이 높다.[[https://terms.naver.com/imageDetail.nhn?docId=3378191&imageUrl=https%3A%2F%2Fdbscthumb-phinf.pstatic.net%2F4299_000_1%2F20160317160509937_TI0XWRZG6.jpg%2F1970N00237_i2.jpg%3Ftype%3Dm4500_4500_fst_n%26wm%3DY&cid=60487&categoryId=60494|#]]] 다만 "돌아와요 충무항에"는 당시에 거의 전혀 알려지지 못했는데, 지금의 곡과는 달리 다소 늘어지는 반주였고, 가수였던 김해일은 음반 발표 후 별다른 활동을 안 하다가 군에 입대를 했고, 1971년 휴가를 나왔다가 [[대연각호텔 화재|대연각 화재사건]] 때 사망하고 말았다. 그의 사망 후 슬픔에 잠긴 유가족들은 음반을 전부 회수해 불사르면서 묻혔다가, 훗날 김성술의 친구가 간직하고 있던 음반이 세상에 다시 드러난다.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0152300|#]] [[http://www.hansannews.com/news/articleView.html?idxno=46398|#]] KBS 방송자료실에도 보관되었던 모양이다.[[https://terms.naver.com/entry.nhn?docId=3378191&cid=60487&categoryId=60494|#]] 작곡가 황선우는 이 곡이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1972년에 이 곡을 다시 김트리오의 멤버였던 [[조용필]]에게 줬다. 황선우는 제목을 원래 자신이 원했던 "돌아와요 부산항에"라고 바꾸고 가사도 일부 수정하여 1972년에 발표했다. 하지만 이 때도 곡은 크게 히트하지는 못했다. 이 1972년 버전은 일명 "돌아와요 해운대에"라고도 알려져 있는데, 그 이유는 2절에 해운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.(1972년 "돌아와요 해운대에"라는 제목으로 당시 조용필과 이남이 등이 팀을 이룬 김트리오에게 넘겼다는 설이 있다.[[http://www.ohmynews.com/NWS_Web/view/at_pg.aspx?CNTN_CD=A0000152300|#]]) 4년 후인 1976년 조용필이 다시 이 곡을 빠른 템포로 편곡하고 가사의 일부를 수정하여 본인의 독집 앨범에서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. 이 곡은 황선우가 작곡 겸 작사가로 기재되어 있지만, 가사의 일부분은 과거 김해일이 작사한 "돌아와요 충무항에"와 같았다. 2004년에 [[스펀지(KBS)|스펀지]]에서 "돌아와요 부산항에"와 관련된 이야기가 방송이 나간 후, 작사자 김해일(본명 김성술)의 어머니가 2004년 가사 표절 소송을 제기했다.[[http://media.daum.net/entertain/enews/view?cateid=1033&newsid=20070604153805134&p=starnews/|#]] 재판 결과 3천만 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났고, 이후 황선우가 김성술의 유족들에게 합의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표절 논란은 일단락되었다.[* 지금의 노래 제목은 황선우가 처음 지었을 때 붙인 노래 제목이라고 한다.][[http://news.khan.co.kr/kh_news/khan_art_view.html?artid=200706041826581&code=940301|#]] [[http://www.law.go.kr/%ED%8C%90%EB%A1%80/(2004%EA%B0%80%ED%95%A94676)|서울서부지법 2006. 3. 17., 선고, 2004가합4676, 판결]] 이후에도 조용필은 이 곡을 다시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로 편곡하여 1980년에 조용필이 정규 1집을 발표하면서 수록되었다. 가장 널리 알려진 게 바로 1980년 버전이다. 이 노래가 히트한 배경에는 발표 당시에 [[재일 한국-조선인|재일교포]]들의 고국방문이 활성화되면서 그 정서가 이 노래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. 이후로 이 노래는 "[[부산 갈매기]]", "[[이별의 부산정거장]]"과 더불어 [[부산광역시]]를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조용필의 최대 히트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